한국인 최초로 테이트에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인 이숙경 박사의 영국문화계 소식입니다. 영국의 미술관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에 앞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미술의 성장과정과 배경을 두 편에 나누어 소개합니다.
영국정부의 지원을 통해 성장한 영국의 공공미술과 미술산업
보수당과 노동당이라는 양당 체제를 지속해 온 영국 현대 역사에서, 미술을 비롯한 예술 진흥 및 보조 정책은 집권당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두 갈래로 현격하게 분리되곤 했다. 시장 경제의 경쟁 원칙과 자생적 성장을 중시하는 보수당 정권은 공공 미술관이나 미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최소화하려는 데 반해, 기회의 평등과 예술의 접근 가능성을 중시하는 노동당 정권은 공공 기금을 통한 미술 지원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수상 집권기였던 1990년대 말부터 십여 년 간은, 노동당 고유의 문화 진흥 정책이 영국 경제의 부흥과 함께 그 전성기를 맞이하여, 공공 미술관 및 미술 산업에 대한 장려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대영 박물관 (British Museum), 내셔널 갤러리 (National Gallery), 테이트 갤러리 (Tate Gallery) 등 영국의 대표적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이 시기에 정부 및 공공 기금에 힘입어 야심적인 건물 확장 프로젝트를 계획하거나 완성할 수 있었고, 런던뿐 아니라 크고 작은 도시에서 지방 정부의 후원을 받는 중소 규모의 아트센터와 공공 갤러리가 새로 문을 열거나 기존 활동을 확장하였다. 직접적인 정부 단체는 아니지만, 복권 기금 (Lottery Fund)을 예술 분야에 지원하는 잉글랜드 예술위원회 (Arts Council England)의 역할도 이에 따라 더욱 커졌고, 많은 신진 미술가들과 소규모 미술 단체들이 예술위원회기금을 통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던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오래된 밀가루 창고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공업 지대이던 타인사이드 게이츠헤드 (Gateshead)의 대표적 미술 센터로 2002년 문을 연 발틱 (Baltic), 노팅험의 역사적인 레이스 시장 터에 2009년 새로운 건물로 들어선 노팅험 컨템퍼러리 (Nottingham Contemporary), 영국의 대표적 건축가 중 하나인 데이빗 치퍼필드 (David Chipperfield)가 디자인하여 2011년 나란히 문을 연 영국 남동부 켄트 지역 마게이트 (Margate)의 터너 컨템퍼러리 (Turner Contemporary)와 요크셔 지역의 헵워스 웨이크필드 (Hepworth Wakefield) 등은 소장품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 프로그램과는 구별되는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인 미술의 새로운 장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공유하는 새로운 공공 미술기관들이다. 이들은 지역 정부와 영국 예술위원회의지원금을 통해 실현된 프로젝트라는 공통점을 지닐 뿐 아니라 국제 미술의 첨단을 반영하는 미술 프로그램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목적도 공유하고 있다.
이 같은 미술 기관들의 앞다툰 개관 현상은 영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와 발맞추어 대중이 향유하는 미술 또한 국제적이고 동시대적이어야 한다는 미술계의 요구와 중앙 및 지역 정부의 미술 대중화 정책이 이상적인 합의점을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영국 신진 작가들에게 본격적인 전시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영국에서 선보일 기회가 없거나 드물었던 외국 미술가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이들 신진 미술 기관들이 공통적으로 주력하는 새로운 미술, 새로운 작가 발굴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미술 기관들이 주목 받는 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된 주된 원천이다.
대표적인 현대미술상 터너 프라이즈
1984년 처음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그 중요성이 급격히 증가한 터너상(Turner Prize)는 영국의 대표적 공공 미술관인 테이트 (Tate)가 주관하는 현대미술상으로, 영국 미술의 동시대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해마다 네 명의 수상 후보 작가를 선정하여 함께 전시를 선보이고, 전시가 마무리될 무렵 수상자를 발표하는 터너 프라이즈는, 영국 주요 민영 방송사인 ‘채널 4’의 미디어 후원으로 텔리비전 프로그램으로 방영됨으로써, 더욱 폭넓은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의 첨단 현장을 알리는 대표적 행사로 자리 잡았다.
50세 미만의 작가로서 지난 한 해 동안 주목할 만한 전시나 프로젝트를 보여 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터너 프라이즈의 수상 기준은, 아주 젊은 작가보다는 이미 미술계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닌 중견 작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편 ‘영국 미술가’라는 기준 또한 영국에서 태어난 작가들뿐 아니라 영국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외국 작가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영국 현대미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작가들을 모두 대상으로 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물론 모든 시상 제도가 그렇듯이, 터너상또한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못한다. 수상 작가들이 미술계 전반뿐 아니라 특히 미술 시장에서 급격한 주목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상업성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장 큰 비판 이유는 지나치게 개념주의적이라거나 비대중적인 난해함을 지원한다는 쪽으로 치중됨으로써, 터너상 자체보다는 현대미술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과 세계 현대미술계의 주요 이벤트로 자리잡은 프리즈 아트 페어
한편 2003년 런던에서 시작된 프리즈 아트 페어 (Frieze Art Fair)는, 영국 현대미술과 세계 미술의 지형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미 비중 있는 현대미술 전문지 ‘프리즈 (Frieze)’를 출판해 온 아만다 샤프 (Amanda Sharpe)와 매튜 슬로토버 (Matthew Slotover)에 의해 시작된 이 아트 페어는, 해마다 10월이면 런던 미술계를 들뜨게 하면서 세계 미술 캘린더의 주요 일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런던 중심 지역 리젠트 공원 임시 건물에서 선보이는 프리즈 아트 페어는 80퍼센트에 달하는 관람객이 작품 구매보다는 이벤트 자체를 경험하기 위해 방문하는 대중들이라는 점에서, 소수 컬렉터들뿐 아니라 다수의 미술 애호가들이 즐기는 아트 페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 갤러리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비록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아시아, 남미, 동유럽 등에 자리한 갤러리들의 참여도 꾸준히 늘어났다. 수 년 전부터 런던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프리즈 아트 페어가 열리는 기간 동안 주요 전시들을 기획함으로써 런던으로 몰리는 세계 미술계의 눈을 공유하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2007년의 세계 경제 위기는 영국의 미술계에도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10여 년 이상 지속되었던 정부의 지원, 민간 차원에서의 공적 기금, 기업 차원의 후원 등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전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공공 미술 기관들의 존속 자체가 위기에 처했고,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연합 정부의 등장으로 인해 정책적 차원에서의 미술 진흥도 그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미술의 독립, 체계에 기대지 않는 비판적 미술의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주장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분명 지난 10여년과는 다른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 그 미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입장은 엇갈리지만, 현대미술의 근본적인 생존에 대한 확신은 여전히 영국 미술계 전체가 공유하는 모습이다.
필자: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 큐레이터 이숙경
이숙경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던 이숙경은 1996년 런던 시티대학 예술비평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 과정을 마쳤고 이후 에섹스 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내 다양한 예술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2007년 말 테이트리버풀로 옮겨 큐레이터이자 테이트 미술관의 아시아-태평양 소장품 구입위원회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테이트 모던 아시아 태평양 리서치 센터에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