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마임축제,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에서 국제교류업무를 담당한 바 있는 박지선 프로듀서가 브라이튼 페스티벌 속의 공연예술전문가를 위한 프로그램, ‘카라반 쇼케이스’를 참가하여 보고 느낀 것을 두 편의 후기를 통해 공유합니다. 이번 참가 후기 1편에서는 카라반은 어떤 행사인지, 그리고 그 초반 일정을 소개합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버금가는 축제, 브라이튼 페스티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2시간 가량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은 영국의 남쪽 바닷가, 일반인들에게는 휴양지로 잘 알려진 브라이튼(Brighton)이다. 영국의 예상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잘 알고 있었지만, 브라이튼에서 맞닥뜨리게 된 추위엔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태풍이라도 오는 것인가? 브라이튼에는 영국의 가장 좋은 날씨와 가장 안 좋은 날씨가 공존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겨우 4일. 브라이튼에 머무는 기간 동안 브라이튼의 또 다른 날씨를 경험하기를 바라며, 어둠과 바람 속을 뚫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브라이튼의 5월은 에든버러의 8월이다. 5월 3주간 열리는 브라이튼 페스티벌(Brighton Festival)은 연극, 무용, 음악, 서커스, 문학 등의 야외 프로그램과 어린이 퍼레이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득한 복합 예술 축제이며, 올해로 48회를 맞이했다.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다음으로 영국에서 가장 큰 축제로, 영국과 해외의 혁신적인 예술가와 작품들을 소개하고 제작하고 있다. 올해에도 호페쉬 쉑터(Hofesh Shechter), 빔 반데케이버스(Wim Vandekeybus), 드리트리 크라이모브(Dmitry Krymov), 칙 바이 조울(Cheek by Jowl) 등 굵직굵직한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브라이튼 페스티벌 역시 에든버러 페스티벌처럼 프린지를 진행한다. 브라이튼 프린지(Brighton Fringe)는 5월 한 달 동안 열리는데, 이 행사가 브라이튼을 축제의 도시로 화려하게 채워주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공연예술 전문가라면 매 홀수 년마다 열리는 에든버러 쇼케이스(Edinburgh Showcase)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 짝수 년, 카라반 쇼케이스(Caravan Showcase)가 열린다. 내가 브라이튼까지 온 목적이 바로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이다.
카라반은 공연예술 전문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영국 남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로덕션 컴퍼니 판햄 몰팅(Farnham Maltings)과 브라이튼 페스티벌이 공동 기획·운영하고 있다. 영국뿐 아니라 해외 공연예술 관계자 약 60여명을 초청, 공연, 마켓플레이스, 피치세션 등을 운영하고 있다. 주 목적은 영국 예술가와 단체들이 해외 예술가와 단체들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
공연예술 전문가를 위한 카라반 쇼케이스
5월 11일 본격적인 카라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도착한 등록 장소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안면 있는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이어진 환영행사에서 카라반 행사의 감독이 예술은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며, 카라반은 예술가와 공연예술 관계자 간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말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그는 카라반 축제 기간 동안 소개될 공연에 대해서 언급하며 ‘마켓(Market)’, ‘매매(Transactions)’보다는 ‘새로운 대화(New Conversation)' 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카라반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지식과 경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새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격려했다. 북미와 아시아의 대표적인 공연예술 행사들이 마켓(Market)이란 용어를 사용하긴 하나, 새로운 방식의 교류와 협력에 대한 요구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단순하게 사고파는 것을 넘어 교류와 공유의 폭을 확대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환영행사 이후에는 참가자들끼리 무리지어 이 극장 저 극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보러 다녔다. 카라반에서는 '영국의 New Work'를 소개하고 있다. 신작이라는 의미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 이 시대의 새로운 연극적 언어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셰익스피어와 연극의 전통이 강한 영국은 그 전통을 이어가는 만큼 새로운 연극적 형식과 언어를 찾는 것에 대한 탐구 또한 강하고, 넓게 열려 있다.
장소 특정형 1인 뮤지컬 공연 <What is it about that night?>
처음 본 작품은 <What is it about that night?> 이다. 장소 특정형 1인 뮤지컬 공연이다. 15인 정도의 관객들은 극장 로비에서 만나 낯선 건물 입구까지 함께 걸어간다. 문이 열리고 배우가 나와 우리를 안으로 이끌고 나서야 그것이 극장의 입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대 조감독 역할을 하는 배우는 관객을 이끌고 분장실, 복도, 무대 밑, 무대 사이드에 이어 무대 위까지 관객을 이끌고 다니며 보이지 않는 무대의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눈다. 또, 자신의 연극에 대한 철학과 꿈을 노래한다. 관객들은 이 과정에서 앞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배우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무대의 스태프들을 상상해본다.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무대가 아닌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여 공연하는 장소 특정형 장르가 생소할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우리나라 광주에서 장소 특정형 공연 ‘원 데이, 메이비(One Day, Maybe) 언젠가’를 연출한 영국인 트리스탄 샵스는 1999년 장소 특정형 공연 제작사 드림씽크스피크(Dreamthinkspeak)를 창립하였다고 하니 영국에서는 그 역사가 긴 편이다. 이번 장소 특정형 1인 뮤지컬 공연을 통해서 영국의 장소 특정형 공연의 형식이 보다 다양한 관점과 형식, 규모로 창작되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뉴 댄스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A String Section> 공연
첫 날 본 공연 중 <어 스트링 섹션(A String Section)>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여러 질문들과 함께 남아 있는 공연이다. 공연은 뉴 댄스 프로젝트(New Dance Project)의 일부로 소개된 것인데, 공연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100여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5개의 나무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곧 이어 검정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 입은 5명의 여자들이 마치 첼리스트처럼 그 의자에 앉는다. 단, 그들은 첼로 대신 손에 톱을 들고 있다. 그리곤 그들은 의자의 다리를 마치 연주하듯 톱질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연주는, 아니, 톱질은 의자의 균형을 점점 깨뜨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균형도 깨뜨리게 된다. 배우들은 마치 줄을 타듯 의자에 몸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다. 관객들은 톱질이 부진한 배우 한 명을 보며 응원하게 된다. 이 공연은 창고, 도서관, 무너질 것 같은 건물 앞, 지어지지 않았어야 하는 다리 앞, 고속도로 옆 등 다양한 곳에서 진행될 수 있다고 한다. 톱을 드는 순간 공연이 되는 이 작품. 한참이 지나도 내 머릿속에서 작품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 의자에 앉아있을까? 우리의 의자를 누가 톱질하고 있는 것인지? 의자의 위에서 배우들이 고수했던 우아한 표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저녁에는 모든 참가자가 함께 식사했다. 같이 밥 먹는 것만큼 네크워크 구축에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은 동 서양의 진리인 듯하다.
카라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2편에서 이어집니다.
박지선
춘천마임축제에서 해외프로그래밍과 기획실장을 담당한 바 있는 박지선은 아시아나우프로덕션에서 한국 연극단체들과 해외 방방곡곡의 축제와 극장을 찾아다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교류부 전략기획팀장을 맡았다. 지금은 현장에서 독립 프로듀서들과 '프로듀서그룹 도트' 를 만들어 창의적이고, 신나고 재미있는 생각과 일들을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