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룬 미르자(Haroon Mirza)는 빛, 소리, 전자파와 기타 오브제들을 작품 안에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융합하는 작품 활동을 선보여온 아티스트로 얼마 전 한국에서의 첫 단독 전시 <회로와 시퀀스>(2015.10~2016.2)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성공리에 개최하였습니다.
작품 그 자체만이 아니라 작품 외의 맥락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키며 미디어 아트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티스트 하룬 미르자에 관한 이야기를 경기도 미술관의 이채영 학예사가 전합니다.
하룬 미르자: 사운드 스케이프의 뒷면
하룬 미르자(Haroon Mirza)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였다. 그는 당시 <그때와 지금의 국립 비파빌리온 The National Apavilion of Then And Now>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젊은 작가에게 주는 은사자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완벽하게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고, 관람객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흡수되는 무반향의 공간속에 원형의 LED가 전자파와 마찰되는 소음을 뿜어대는 가설 공간, ‘파빌리온’ 이었다. 같은 해 비엔날레의 황금사자상은 영화 속에 감춰진 시계 혹은 시간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콜라주된 <시계 The Clocks>의 크리스찬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가 수상했다. 이 작품은 작품 속 24시간과 현재의 실시간을 동기화한 작품으로 24시간의 러닝타임을 지닌 작품이었다.
하룬 미르자와 함께 짝을 이룬 이 해의 비엔날레 수상자의 조합은 동시대 예술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함축하고 있다. 무진동의 공간속에 백색 소음의 전자파를 증폭시켜 시공간이 응축된 사운드 스케이프*를 만들어내는 하룬의 작업과 24시간이라는 절대적 시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크리스찬 마클레이는 묘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비디오 아트가 '시간의 구조'를 모방하며 이로써 오랫동안 '공간 예술'로 지칭되어 온 예술이 ‘시간’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백남준의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예술가의 작품은 상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시간의 대비를 경험케 하고 동시대 ‘시간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예술적 재현의 극대치를 제시했다.
2011년의 비엔날레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이름을 걸고 전시하는 수많은 파빌리온들이 존재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적 해석으로 비체 크뤼거(Bice Curiger) 예술 감독은 몇몇의 작가들에게 ‘파빌리온’ 자체를 작품의 ‘화두’로 제시했다. 이를 제시 받은 작가 중 한 명이었던 하룬 미르자는 자신의 파빌리온에 말 그대로 비엔날레가 제시하는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미로 ‘비(非)파빌리온 apavil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자신의 파빌리온이 “작품이 전혀 없는 파빌리온”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파빌리온과 대조되었다고 말했지만, 강렬한 LED의 불빛과 전자 노이즈로 이뤄진 그의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악기였다.
<백페이드 5>와 <성역>을 중심으로
하룬 미르자는 작품이 구현되는 공간과 상황, 그리고 그 시간 자체를 작품의 레퍼런스로 활용하고 매개하여 작품의 맥락을 만들어 나간다. 이를 통해 그는 작품을 구성하는 미디어의 존재론적 측면과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한다. 하룬 미르자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가진 “x_sound: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 전시에서 소개한 <백페이드 5 Backfade_5 >와 <성역Sanctuary>이라는 작품으로 예를 들어 보자.
<백 페이드 5>는 공간 속에 고무줄로 미니멀한 3D의 드로잉을 구축하는 프레드 샌드백(Fred Sandback)의 작품에서 영감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하룬 미르자는 이 작품에서 샌드백의 드로잉과 유사한 형태로 LED를 설치하고 이 LED 빛의 파장과 전자파의 마찰음, 우퍼의 진동과 동전이 만들어내는 베이스음으로 이뤄진 사운드 스케이프를 만들어낸다.
<성역>에서는 비디오 작가 알렉산드라 지그너의 비디오 영상과 자신의 설치를 연결한다. 벽에 LP 레코드를 집어던지는 한 여성의 동영상 앞에는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안테나가 돌아간다. 안테나의 회전은 탁자 위에 놓인 조명, 스피커등과 만나 파장과 마찰음을 만들어내고 화면 속의 LP 판이 부서지는 장면과 라디오의 노이즈는 동기화된다. 집에서 사용하던 낡은 가구들과 전자제품들, 이제는 사라져가는 매체 LP가 만들어낸 사운드 스케이프는 ‘미디어’가 기억하는 시간에 대한 은유이자 ‘미디어’가 던진 ‘메시지’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 주: '사운드 스케이프'란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환경운동가인 R.M Schafer가 조합한 단어로 ‘Sound’와 ‘scape’의 복합어로써 청각을 통해 들리는 풍경, 즉 시각적인 경관과 대비되는 청각적 풍경으로써 소리경관을 의미한다.